체 게가라(Che Guevara), 본명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는 1928년 (당시 세계에서 손꼽히는 선진국이었던)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의 중상류층 백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스페인어로 사람을 부를 때 쓰는 말인 '체'는 훗날 혁명에 투신한 그가 스스로 사용한 이름이다.
그는 1945년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주해 1947년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1951년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모터사이클로 남아메리카 일대를 여행하기도 했다.
1953년 의학 박사학위를 받고 두 번째 여행을 떠났다. 여행에서 목격한 남아메리카 민중의 비참한 현실이 체를 혁명의 길로 이끌었다. 그는 과테말라에서 여성 혁명가 일다 가데아 아코스타를 만나 결혼했다. 당시 민주선거로 집권한 과테말라의 아루벤스 구스만 진보정권이 미국의 지원을 받은 카스티요 아르마스의 쿠데타로 무너지자, 체는 비폭력 개혁이 아닌 무력 혁명을 결심했다. 멕시코로 탈출한 1955년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 쿠바 혁명군에 투신했다. 카스트로는 풀헨시오 바티스타의 쿠데타로 쿠바 대통령선거가 무산되자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멕시코로 망명한 상황이었다.
군사훈련을 거쳐 해방운동에 본격 동참한 체는 1957년 반군 대장으로서 시에라마에스트라 산맥에서 쿠바 정부군과 게릴라 전투를 벌였다. 1958년 말 산타클라라에서 승리를 거둬 수도 아바나에 입성했다. 독재자 바티스타는 도미니카로 망명하고 카스트로가 총리에 취임했으며, 체는 혁명의 공로를 인정받아 쿠바 국민이 됐다. 이 무렵 첫 번째 아내인 아코스타와 이혼하고 반군 동지 알레이다 마치와 재혼했다.
체는 카스트로 정부의 대사로 이집트, 인도, 유고슬라비아, 인도네시아 등의 지도자를 만나 반제국 • 반식민주의 외교활동을 펼쳤다. 그밖에도 '쿠바의 두뇌'로서 중앙은행 총재와 산업부 장관, 국가토지개혁위원회 위원장 등에 취임해 산업 국유화와 의료 개혁을 추진하고 정권의 기초를 세웠다.
1961년 쿠바는 미국의 '피그만 침공'을 물리쳤으나 경제봉쇄에 직면했다. 체는 소련을 방문해 경제 및 군사 지원을 요청했고, 쿠바 국내에 소련 핵미사일을 배치했다. 그러나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미 • 소 협상으로 미사일이 철수되자 실망한 그는 1965년 1월 소련이 사회주의 혁명의 종주국임을 부정했다. 소련 정부는 체의 공직 사퇴를 요구했다.
5월에 그는 카스트로에게 "쿠바에서 할 일은 다 끝났다"는 내용의 긴 편지를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체는 혁명 게릴라들의 국제전선을 마련하고자 콩고로 떠났지만, 아프리카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해 혁명에 실패했다. 차선으로 그는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노동계급의 대중혁명을 완성하기 위해 새로운 활동에 나섰다.
1952년 '볼라비아 혁명'으로 등장한 정부를 1964년 쿠데타로 전복시킨 르네 바리엔토스 군사 독재정권에 대항하기로 한 것이다. 1966년 말 볼리비아로 잠입해 공산당과의 연계를 모색하며 고군분투했지만 잘 풀리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영향력으로 인해 남미 장악에 어려움을 겪은 미국이 체의 목에 현상금을 걸고 추적했으며, 볼리비아 고산지대에서 지병인 천식도 악화됐다. 11개월 동안 추적을 피해 도망 다니던 그는 결국 1967년 10월 8일, 매복에 걸려 산중에서 총상을 입고 볼리비아 정부군에 생포됐다. 마을 학교에 감금당한 체는 다음 날 미국의 동의 아래 볼리비아 정부군 마리오 테란 하사관에 의해 사살됐다. 망설이며 체를 쏜 그 군인은 반년 후 투신자살했다. 볼세출의 혁명가 체 게바라는 양손이 절단된 채 암매장됐고, 그의 두 손은 신원 확인을 위해 미국으로 보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