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F.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는 1917년 미국 매사추세츠 브루클라인의 부유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일랜드 이민자의 후손인 아버지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후원자이자 주영 미국 대사로도 활동했으며, 어머니는 보스턴 시장을 지낸 존 F. 피츠제럴드의 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엘리트 교육을 받고 하버드대학교에 진학해 정치학을 전공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해군에 복무해 훈장을 받고 전쟁 영웅이 됐다.
1944년 형이 비행기 폭발 사고로 사망하자, 케네디 가문의 기대는 그에게로 옮겨졌다. 1946년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고, 1952년 매사추세츠 상원의원으로 선출됐다.
1953년 <타임 헤럴드> 사진기자 재클린 부피에와 결혼했으며, 1957년 《용기 있는 사람들》이라는 저서로 퓰리처 상을 수상했다. 이듬해 민주당 부통령 후보로 출마해 낙선했지만, 이 경험으로 자신의 대중적인 인지도를 높였다. 1958년 상원의원에 재선된 후, 1960년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다. 그는 새로운 개척자정신으로 국내외 문제를 개선하자는 '뉴 프런티어'를 구호로 내새워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을 꺾고 당선됐다. 생방송 텔레비전 토론에서 우위를 점한 것이 승리의 큰 요인이었다.
1961년 초 케네디는 미합중국 제35대 대통령(선거를 통한 역대 최연소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자리에서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자문하라"는 명연설로 미국민과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취임 초기 피델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망명자들로 쿠바 상륙작전을 펼친다는 CIA(미국 중앙정보국)의 다소 황당무계한 '피그만 침공' 계획을 승인해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이는 냉전시대의 외교 문제로 비화되어 소련과 군사적으로 대립하는 '쿠바 미사일 위기'로 이어졌다.
데프콘(전투 • 방어준비태세)이 3단계까지 발령되어 제3차 세계대전(핵전쟁 위기)이 눈앞에 다가온 상황에서, 소련이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시키고 미국은 쿠바를 무력침공하지 않을 것을 약속해 극적으로 타결됐다. 미 • 소 정상은 핫라인을 개설했으며, 케네디는 전화위복으로 국내 지지도가 급상승했다. 다만 이 사건 이후 일시적인 해빙 분위기 이면에서 양국의 군비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냉전은 심화됐다.
케네디는 쿠바 혁명의 영향을 축소하기 위해 중남미 20여국과 '진보를 위한 동맹'을 결성했다. 1963년 6월 베를린을 방문해 "나는 베를린 사람입니다"라는 연설로 독일 안보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 서독인의 환호를 받았다. 이처럼 응변은 그의 가장 큰 무기였지만 의회 및 군부와의 관계는 원활하지 못했다. 그러나 '부분적 핵실험 금지조약'을 성사시키고 우주개발계획을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민권운동에 호의적이었던 점 등은 케네디가 역사적으로 후한 평가를 받는 요인이 됐다.
베트남 문제 개입에 있어서도 신중하게 접근했으며 중국과 재수교를 추진하고자 했지만 1963년 11월 22일 텍사스 댈러스에서 영부인과 함께 오픈카로 퍼레이드 도중 총격을 입고 사망했다. 암살 용의자는 리 하비 오스월드로, 범행을 자백하지 않았다.
이틀 뒤 그는 교도소 이송을 위해 경찰서에서 나온 순간 나이트클럽 주인 잭 루비에 의해 사살됐다. 루비는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불과 몇 년 뒤인 1967년 교도소에서 복역 중에 사망했다. 이 같은 일련의 극적인 상황은 케네디 암살의 미스터리를 증폭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