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성은 1605년 섬서지역 연안에서 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이 곤궁해지자 역졸로 근무하다가 1628년 경비절감을 위한 역참 폐지로 일자리를 잃엀다. 이후 규인이 됐지만 식량과 봉급을 받지 못해 농민반란에 합류했다.
1636년 반군의 수장이 된 이자성은 1638년의 전투에서 패한 뒤 겨우 탈출했으나 때마침 청나라와의 전쟁이 벌어져 토벌군이 철수했다.
토지분배와 조세감면의 기치를 걸고 민중의 지지를 받으며 세력을 키운 그는 낙양, 개봉, 양양 등지를 차례로 점령해나갔다.
1644년 서안을 함락시킨 후에는 대순을 건국하고 황제로 즉위했다. 이자성은 즉시 북경으로 진격해 그해 4월 자금성을 차지했으며, 이로써 명나라는 멸망했다. 하지만 수도 점령 후 약탈을 일삼으며 군율이 무너진 군대는 곧 청나라에 투항했던 명의 장수 오삼계에 의해 패퇴했다.
이자성은 이후 벌어전 몇 차례의 전투에서 연달아 패배했고, 1645년 도피 중에 살해당했다고 알려졌으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그 불분명한 최후 때문에 자결설과 탈출설이 공존한다.
이자성의 난
1620년대 중반 동북아시아 전역에 대기근이 몰아닥쳤는데, 특히 1627년 섬서 일대의 기근이 극심해 굶주리던 농민들이 봉기했다. 여기에 탈영한 군인과 실직한 빈민 등이 가담했고, 1628년 왕가윤이 반란군을 조직화했다.
왕가윤이 전사한 뒤에는 고영상이 뒤를 이었다.
2대 반란 지도자 고영상은 화북 전역을 휩쓸며 스스로 '틈왕'이라 칭했다. 하지만 그는 1635년 위남 전투에서 진압군에 사로잡혀 수도로 압송되고 1636년에 처형당했다.
반란군이 와해된 가운데 고영상의 사위인 이자성이 투항을 거부하고 '이틈왕'을 자처하면서 남아 있는 극소수 반군의 수장이 됐다. 이후 전세의 변화를 거듭하며 대순 건국과 자금성 함락, 오삼계와의 공방전, 이자성과 장헌충의 최후에 이르기까지, 1627년부터 1646년까지 지속되어 명나라를 멸망시킨 이 농민반란을 통칭 '이자성의 난'이라고 한다.
명말청초의 풍운아
1644년 오삼계는 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산해관에서 청나라와 대치 중이었는데, 이자성이 북경을 함락시키자 청에 투항했다. 그는 다시 명 • 청 연합군을 이끌어 이자성을 몰아냈으며, 곧이어 화남의 남명정권을 무너뜨리고 그 자신이 직접 명나라 황족을 살해했다.
청나라 조정에 의해 운남의 평서왕에 봉해진 오삼계는 또 한 번 입장을 바꿔 1673년 광동의 상지신, 복건의 경정충과 함께 한족 항쟁인 '삼번의 난'을 일으켰다. 그는 1678년 주나라의 황제로 즉위했지만 반년도 못 가서 사망했고, 1681년 남은 오삼계 일가가 멸족당하면서 반란도 종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