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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과 간웅의 두 얼굴,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

Genius Dotory 2022. 8. 26. 17:04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Albrecht Wenzel Eusebius von Wallenstein)은 1583년 보헤미아 헤르주마니체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조실부모 뒤 숙부의 후원 아래 유럽 각지에서 개신교 교육을 받았으나 1606년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1609년 보헤미아로 돌아와 두 번의 결혼을 발판으로 가세를 확장했으며, 1618년 발발한 30년 전쟁(제1기 보헤미아 • 팔츠 전쟁) 당시 재산을 몰수당하고 빈으로 탈출했지만 곧 기병대를 모지해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활약했다.
신성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의 신임을 얻은 그는 보헤미아 왕국 총독으로 임명됐고, 북동부 보헤미아의 드넓은 영지를 사들여 제후의 반열에 올랐으며, 1625년 화폐발행권을 가진 프리틀란트 공작이 됐다.
강력한 재정과 병력을 바탕으로 황제국 총사령관이 되어 덴마크와 북부 독일 연합군을 격퇴했고(제2기 덴마크 전쟁), 전 독일을 제패한 뒤 더욱 승승장구하여 제국 함대와 북해 및 발트해 제독의 지위에 이르렀다.
거대 무역회사 설립과 발트해 국가 건설을 독자적으로 구상했으나 무산된 이후, 1630년 황제와 독일 선제후들의 정략적 판단에 따른 결과로 총사령관에서 면직됐다.
1631년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이끄는 스웨덴군에 의해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틸리 백작이 패전한 뒤 발렌슈타인은 총사령관에 재기용되어 황제군의 절대적 지휘권을 위임받았다(제3기 스웨덴 전쟁). 그러나 그는 1632년을 기점으로 몰락에 접어들었다.
작센, 브란덴브루크, 스웨덴, 프랑스 등과의 독단적 화의 진행으로 황제를 비롯한 여러 세력의 반감을 샀고, '필젠 선언문'을 기반으로 반란을 모의한 일이 알려져 총사령관에서 다시 해임됐다.
발렌슈타인은 스스로 사퇴서를 제출하고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숙청 명령을 돌이킬 수 없었다. 1634년 마지막 저항을 모의하던 중 결국 황제파 군인들에게 암살당했다.

페르디난트 2세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2)는 1619년 신성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자마자 선대 황제가 허용한 종교자유를 무시하고 신교도 탄압정책을 펼쳤다. 그는 이미 1617년 보헤미아 국왕이 됐을 때 개신교 예배당을 강제로 철거함으로써 1618년 (최후의 종교전이자 최초의 국제전인) 30년 전쟁의 발단이 된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과 뒤이은 프로테스탄트 봉기를 촉발시켰다.
당시 프라하 광장에서 얀 예세니우스와 보헤미아인 대표 26인의 혀를 자르고 능지처참한 뒤 무려 10년 동안이나 효수하는 잔학행위를 저질렀다.

스웨덴의 사자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Gustav 2 Adolf)는 '북방의 사자왕' 또는 '근대전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의 명지휘관이었으며, 스웨덴의 내정개혁에 성공해 강대국의 반열에 올려놓은 유능한 왕이었다.
1630년 그가 프랑스 리슐리외 추기경의 보급 지원을 받아 30년 전쟁에 참전함으로써 이 전쟁은 비로소 독일의 내전에서 명실상부한 국제전이 됐다.
1631년 브라이텐펠트에서 틸리 백작의 군대를 압도적으로 제압했고, 1632년 뤼첸에서 발렌슈타인과 맞붙어 승기를 거뒀지만 전쟁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강력한 적장이었더 그의 죽음으로 인해 황제게에 은연중에 견제당하고 있던 발렌슈타인은 공공연한 제국의 역적이 됐다.
발렌슈타인이 처음 총사령관에서 해임된 1630년 당시 그와 구스타브 2세 사이에는 모종의 밀약이 있었고, 이 사실은 황제에게 발각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