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벨 1세(Pavel 1)는 1754년 러니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제위계승권자 카를 울리히 대공(훗날 표트르 3세)과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대공비(훗날 예카테리나 2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와 떨어져 옐리자베타 여제에 의해 양육됐다.
표트르 3세가 즉위한 반년 뒤인 1762년, 무능한 남편을 대신해 섭정을 펼치던 예카테리나 황후가 쿠데타를 일으켜 표트르 3세를 폐위시키고 여제로 즉위했다.
파벨은 34년 동안 황태자의 자리를 유지했지만 차르인 어머니와 불화했다. 이는 1773년 일어난 대규모 농민반란 지도자 푸가초프가 스스로 표트르 3세라고 자처하면서 파벨의 옹립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1796년 차르에 즉위한 뒤, 파벨 1세는 어머니가 펼친 정책 대부분의 반대편에 섰지만 일관적이지 않았다.
먼저 부계장자계승 원칙을 확립한 뒤, 중앙집권 독재정책으로 회귀했다. 아울러 예카테리나 대제 치세에 무제한 확장된 귀족들의 특권을 제한했으나 농노들의 수는 더욱 늘어났다.
프랑스 대혁명이 러시아 민중의식에 미치는 영향을 억제하기 위해 언론을 탄압하고 반프랑스 동맹에 가담했지만, 1799년 나폴레옹 독재가 시작되자 영국과 단교하고 프랑스와 강화를 맺었다. 또한 프로이센의 군제를 모방해 군대의 반발을 샀고, 아들들을 정적으로 의심해 궁정에서 추방했다.
귀족들의 미움을 산 파벨 1세는 1801년 미하일로프스키 궁전 침실에서 표트르 폰 팔렌 백작이 주도한 궁정반란으로 암살당했다. 뒤를 이은 알렉산드르 1세가 파벨 1세의 암살에 동의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어느 정도 묵인했다고 알려져 있다.
예카테리나 대제
예카테리나 2세(Ekaterina 2)는 독일 출신 루터파 개신교 귀족이었는데, 1744년 러시아의 제위계승권자이자 핀란드 국왕인 카를 울리히 대공과 결혼하면서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고 세례명인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로 개명했다. 러시아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어서 옐리자베타 여제의 총애를 받았으며, 점차 귀족과 군부의 확고한 지지를 얻었다.
황후가 된 후 반년 만에 남편을 폐위 • 살해하고 차르로 즉위한 그녀는 계몽전제군주로서 국력슬 크게 향상시켰다.
오스만 제국과의 두 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승리했고,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의 자유로운 출입권을 얻어냈으며, 폴란드 분할 및 프로이센, 헝가리, 독일 일부 확득으로 광대한 영토 확장을 이뤘다.
내정개혁은 물론 러시아 문명화의 선두에서 교육과 예술 진흥에도 총력을 기울여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러나 농노제의 확장 및 고착화를 초래했고, 1773년 3년간 지속된 대규모 농민반란에 직면한 뒤에는 자유주의 이념과 결별했다.
끝없는 남성편력으로 유명한 데다, 표트르 3세가 아닌 정부와의 사이에서 자녀들을 얻었다는 추측이 존재한다.
로마노프 왕조
1613년 부터 1917년까지 약 300년간 러시아를 지배한 로마노프 왕조는 이반 4세(뇌제)의 아들이자 류리크 왕조의 마지막 차르인 표도르 1세가 1598년 후계자 없이 사망한 후, 15년간의 대동란시대를 거쳐 로마노프 가문의 미하일 1세가 차르로 선출되면서 시작됐다.
절대왕정의 기틀을 마련한 표트르 대제가 직접 건설한 계획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수도를 이전했고, 1721년부터 모스크바 공국에서 러시아 제국으로 국가몃명이 변경됐다. 엘리자베타 여제 이후에는 직계혈통이 단절되고, 그녀의 외조카인 표트르 3세(독일 • 스웨덴계 홀슈타인 고토르프 가문)가 로마노프 왕조를 이었다.
예카테리나 대제 치세에 농업 및 상공업 진흥, 문예 부흥, 영토 확장 등으로 국력을 대폭 증강했으며, 알렉산드르 1세 재위기간에 나폴레옹 군대를 물리쳐 유렵싀 강대국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1856년 크림 전쟁의 패배와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 실패, 1905년 러 • 일 전쟁 패배, 제 1 • 2차 러시아 혁명 등을 연이어 겪으며 무능한 왕조는 완전히 몰락하고 소비에트시대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