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브 3세(Gustav 3)는 1746년 스웨덴 국왕 아들로 프레드릭과 프로이센 출신 왕비 로비사 울리카(루이자 울리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771년 홀슈타인 고토르프 왕조의 제2대 국왕에 오른 뒤 국가 권력슬 좌지우지하던 귀족들을 몰아내고, 스톡홀름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새 헌법을 통과니켰다. 구스타브 3세는 왕권신수설을 믿는 전제군주였지만 관세 철폐로 자유무역을 증딘하고 해군력을 강화하는 등 내정개혁슬 실시해 '왕국의 재건자'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러시아 및 덴마크와의 전쟁(1788-1790년)에서 승리했다.
아울러 언론 및 출판의 자유를 허용하고 빈민 구제법을 만들었으며 고문 폐지 등 사법개혁을 단행핺다. 또한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예술 후원에 적극적이어서 스웨덴의 로코코(Rococo) 시대를 열었다.
인간적인 매력이 뛰어났던 그는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으나 1792년 가면무도회에서 왕을 증오한 귀족파 군인의 총격을 받고 치명상을 입어 13일 후 사망했다.
로비사 울리카 폰 프로이센
프로이센의 계몽군주 프리드리히 대왕(프리드리히 2세)을 오빠로 둔 로비사 울리카(Lovisa Ulrika) 왕태후는 왕비 시절인 1756년, 남편 아돌프 프레드릭 국왕을 종용해 귀족세력을 약화시킬 군사정변을 계획했으나 실패한 전력이 있다. 그러나 절치부심 끝에 아들이 왕위를 계승한 후인 1772년, 구스타브 3세와 함께 무혈 쿠데타를 주도하여 1720년부터 계속된 스웨덴 '자유시대'의 정쟁을 종식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앞장섰다.
당시 농민과 부르주아 계층은 귀족정치에 실망해 왕당파를 지지했다.
페르센 백작
구스타브 3세의 최측근이던 한스 악셀 폰 페르센(Hans Axel von Fersen)은 '구스타브시대'로 불리는 스웨덴의 전성기에 일익을 담당했으며, 장교인 동시에 외교 부문에서 활약하면서 여러 유럽 국가와 우호를 다졌다.
그는 국왕의 친프랑스 정책을 충실히 수행했고,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자 2년 뒤 루이 16세 일가의 망명을 도왔지만('바렌느 국왕 일가 도망 사건') 실패했다.
페르센 백작은 1810년 국가 2인자인 제독의 신분으로 스웨덴 왕위계승이 예정된 칼 아우구스트 공작의 독살 혐의를 받아 폭도에게 살해됐으나 얼마 뒤 누명을 벗고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그는 처형당한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연인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