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망은 기원전 45년 한나라에서 태어났는데, 11대 원제의 왕후인 왕정군의 조카였다.
기원전 8년 12대 성제의 치세 당시 재상직인 대사마에 오른 그난 세력을 잡기 전에는 청렴하고 인망이 높아 문무백관과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이후 13대 애제가 요절한 서기 1년에 왕망은 아홉 살인 평제를 추대하여 14대 황제로 옹립했고, 자신의 딸을 왕후로 삼아 황제의 장인이 됐다. 그리고 서기 6년에 평제를 독살하고 두 살짜리 유영(어린아이라는 의미로 '유자영'이라고도 불린다)을 황제로 세웠으며, 자신을 가황제, 섭황제 등으로 칭하며 실권을 장악했다. 결국 왕망은 서기 8년에 선양(임금이 살아있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왕위를 양도하는 것)이라는 형식으로 제위를 찬탈,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신나라를 건국했다. 하지만 재위기간에 왕망은 개혁정책과 대위정책에 실패했으며, 서기 18년 농민반란인 '적미의 난(이 반란군 무리는 눈썹을 붉게 물들였다)'이 일어났고 서기 23년 한나라 황족이자 호족인 유현의 군대가 수도 장안으로 진군했다.
혼란의 와중에 두오라는 상인이 왕망을 암살했는데, 왕망의 몸은 수천 갈래로 흩어졌으며 머리는 효수되어 백성들이 그 혀를 잘라 먹었다고 한다.
왕망의 양면성
『한서 왕망전』은 왕망을 난신이자 도적으로 그리고 있는데, 위선적인 찬탈자이자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만고의 역적이라는 평가다.
왕망은 후하게 평하면 선양혁명 또는 역성혁명(다른 성씨에 의한 왕조의 교체)을 이룬 것이지만, 박하게 평하면 신하로서 왕위를 찬탈한 역적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옛사람들은 망탁조의라고 하여 왕망, 동탁, 조조, 사마의 네 명을 한나라 이후 조위(조조를 시조로 하는 중국 삼국시대의 위나라)와 서진(사마의를 시조로 하는 삼국을 통일한 진나라) 때까지의 4대 역적으로 일컬었다. 그러나 이는 한나라 왕조 복원 뒤의 '승자의 가록'으로, 현대에 와서는 탁고개제(옛사람의 도를 빌어 현실을 개혁함)를 실천하고자 한 유교적 이상주의자였다는 재평가도 이루어지고 있다.
실제로 중국의 역대 창업군주 가운데 유일한 문신 출신인 그가 주장한 제도혁신은 호족의 토지 소유 제한, 노예의 인신매매 금지, 상공업의 국가 통제와 화폐개혁 등이었다. 물론 결과적으로 여러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고 사회혼란을 증대시켜 망국을 자초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