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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를 위한 숭고한 개혁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Genius Dotory 2022. 8. 23. 20:47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Tiberius Sempronius Gracchus)는 기원전 163년경 로마의 영웅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깔 코르넬리아와 유명한 장군이자 집정관을 두 번 지낸 평민귀족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장남으로 태어나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제3차 포에니 전쟁에 출전해 병사들의 신망을 얻었으며, 기원전 137년 재무관으로 선출된 후에도 누만티아 전선에서 훌륭한 외교력을 발휘해 유력인사가 됐고, 기원전 133년 호민관에 선츨됐다.

티베리우스는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적 병폐를 바로잡기 위해 토지개혁에 착수했다. 이로 인해 평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으나 원로원을 비롯한 보수파 귀족세력을 적으로 돌리고 말았다.

마침내 농지개혁법안 투표일, 대회장의 혼란 속에서 강경반대파의 수장 스키피오 나시카(티베리우스의 이종사촌)의 선동으로 평민파에 대한 대규모 학살이 일어났다. 티베리우스는 그 자리에서 살해됐고, 참살당한 다른 300여 명과 함께 티베르(테베르) 강에 시신이 버려졌다.

 

형의 길을 뒤따른 아우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Gaius Sempronius Gracchus)는 티베리우스보다 아홉 살이 어렸는데, 형만큼이나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형이 살해당한 뒤 한동안 조용히 지냈으나, 곧 형의 뜻을 잇기로 결심하고 호민관에 출마해 당선됐다.

개혁법안을 추진하던 가이우스는 기원전 121년 정적들에 의해 궁지에 몰려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하인 필로크라테스의 손을 빌어 목숨을 끊었다는 설과 사로잡혀 살해당했다는 설이 있다. 그 역시 티베르 강에 시신이 버려졌는데, 학살당해 함께 던져진 지지자들의 시신이 무려 3천여 구에 달했다고 한다. 그라쿠스 형제는 기득권을 가지고 태어났음에도 구조적 모순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평민들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한 의지를 굽히지 않다가 최후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