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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그 자신으로 살고자했던 게이 순교자, 하비 밀크

Genius Dotory 2022. 9. 8. 18:23

하비 밀크(Harvey Bemard Milk)는 1930년 뉴욕 주 롱아일랜드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뉴욕대학교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해군에 복무했으며 이후 교사, 보험사 직원, 월스트리트 연구원 등 여러 직업을 가졌다. 그는 동성애자라는 점을 빼면 평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가족에게도 말할 수 없는 삶은 불행핸다. 동성애자에 대한 핍박이 합법화된 미국 사회에서 1969년 6월 28일 최초의 대규모 동성애 인권운동인 '스톤월 항쟁'이 일어나 동성애자 인권 조직이 미국 전역에 설립됐다.
1970년 6월 28일에는 스톤월 항쟁을 기념해 뉴욕, 로스엔젤레스, 시카고에서 동시에 최초의 게이 프라이드(Gay Pride, 동성애자의 자긍심) 행진이 열렸다. 이 행사는 점차 전국으로 확산됐다. 밀크는 1972년 연인 스콧 스미스와 함께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엽 오랜 군복무로 동성애자가 된 젊은 남성들이 아일랜드계 가톨릭 구역 카스트로에 정착해 있었다. 당시 게이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인권의 사각에 놓이 처지였다. 공직에 나설 수도 없었고, 게이임이 밝혀지면 직장을 잃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밀크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커밍아웃했으며, 성 소수자의 인권과 게이 공동체를 인정받기 위해 정치계에 입문했다. 그는 낙선을 거듭했지만 1977년 동성애자 최초로 미국 시의원에 당선됐다. 동성애자 인권 규정 법안이 통과되자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차별금지 조항 철폐를 주장했다. 밀크는 동성애자들이 하나의 정치세력임을 보여주기 위해 커밍아웃을 종용했다. 그는 수많은 협박에 시달렸으며, 자신이 살행당할 것을 각오했다.
동성애자 인권은 정치적 이슈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밀크는 성 소수자 인권운동의 지속을 염원하며 "희망만으로 살 수 없지만, 희망이 없으면 인생을 살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결국 그는 1978년 11월 27일 동료 시의원이었던 댄 화이트에 의해 샌프란시스코 시장 조지 모스코니와 함께 살해됐다.

성 소수자 인권운동 확산
하비 밀크의 암살자 댄 화이트는 보수적인 배심원단에 의해 '정크푸드로 인한 정신장애'라는 어처구니없는 명목으로 정상이 참작됐다. 그는 일급살인이 아닌 충동살인이 적용돼 7년 8개월의 가벼운 형량을 받았다. 이에 분노한 5천여 명의 성 소수자들이 '화이트 나이트 폭동'을 일으켜 14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동성애자 인권 및 평화 운동은 더욱 강성해졌다.
캘리포니아 주는 1999년 미국 최초로 동성혼을 합법화했고, 공립학교에 LGBT(레즈비언, 게이, 트렌스젠더, 양성애자) 역사 수업을 의무화했다. 밀크에게는 2009년 대통령 자유 메달이 추서됐으며, '세계 게이들의 수도'인 샌프란시스코는 국제공항의 이름을 '하비 밀크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으로 바꿨다.
오늘날 샌프란시스코 인구 중 10퍼센트가량이 성 소수자인 자신의 정체성을 당당히 밝히고 있다. 2015년 6월 26일 미국 연방대법원은 동성결혼 합헌 결정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