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애와 미국 인권의 상징이 된 흑인 목사, 마틴 루터 킹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는 1929년 1월 15일 미국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서 침례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비교적 유복한 환경이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에게 멸시받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랐다. 그는 신학교를 마치고 1955년 보스턴대학교 대학원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킹은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의 덱스터 애버뉴 교회에 부임한 뒤로 흑인 인권운동에 투신했다.
1955년 12월 1일 몽고메리 시영버스에서 흑백 좌석 차별 사건이 일어났다.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가 백인 남성에게 버스 내 좌석을 양보하지 않아 경찰에 체포 된 것이다. 파크스는 불법 보이콧(거부) 명목으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분노한 흑인 사회는 킹의 주도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벌였으며, 킹은 양심적인 백인들에게도 참여를 종용했다. 5만 시민이 동참한 비폭력 평화시위로 1956년 말 연방대법원으로부터 버스 인종분리법 위헌 판결을 받아냈다. 이 같은 비폭력주의는 마하트마 간디로부터 영향받은 사상이었다. 킹은 범국민적인 지지를 업고 미국 각지의 흑인 해방 및 인권운동에 주력했다.
1957년 남부 그리스도교도 지도회의(SCLC)를 결성했고, 1963년 앨라배마 주 버밍햄 시위 당시 스스로 경찰서를 찾아가 투옥되기도 했다. 그해 '(일자리와 자유를 위한) 워싱턴 대행진'을 주도한 킹은 8월 28일 노예 해방 100주년을 기념해 링컨 기념관 앞에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로 시작하는 20세기의 대표적 명연설을 펼치기도 했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감시와 사생활 폭로에도 킹의 사회운동은 점점 더 활발해졌다. 베트남전을 '무의미한 전쟁'으로 규정해 파병 반대운동에 동참했으며, 흑인 권리 증진을 위해 공민권법과 투표권법 등 제도 개선을 요구했다. 또 다른 흑인 해방운동가 말콤 X는 킹의 비폭력주의를 타협으로 간주해 비판하기도 했지만, 이 같은 활동이 계기가 되어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인권 및 차별 금지 법안이 추진됐다. 그는 196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수없이 반복된 음해와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았던 킹은 1968년 4월 4일 테네시 주 멤피스의 흑인 미화원 파업운동 지원을 위해 나섰다가 백인 우월주의자 제임스 얼 레이에게 피격당해 사망했다.
죽음의 파장
마틴 루터 킹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선포되어 15만 명 이상이 참석했다. 그의 때 이른 죽음에 분노하여 미국 전역에서 흑인 폭동이 일어났지만, 킹의 비폭력 저항정신에 위배되는 일이라는 흑인 지도자들의 설득으로 폭력시위는 진정됐다. 한편 마틴 루터 킹을 암살한 제임스 얼 레이는 사건 직후 런던으로 도주했으나 목격자 제보로 공항에서 체포, 멤피스로 송환되어 징역 99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자신의 단독 범행이 아니라 CIA 등 국가기관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킹이 베트남 전쟁을 반대한 데 대한 정부 견제가 암살의 동기라는 주장이 있으며, '가난한 사람들의 운동' 마스터플랜을 세우고 경제민주주의의 구조적 혁명을 지향한 그에게 미국 자본가들이 위협을 느껴 암살을 실행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끝나지 않은 인종증오 범죄
2015년 6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의 흑인 교회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벌어져 담임 목사를 포함한 아홉 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현재진행형인 미국의 흑백 갈등을 드러냈으며, 미국 흑인들이 인종차별의 상징으로 여기는 남부 연합기(남북 전쟁 당시 노예제를 지지한 남부 연합의 깃발)를 든 범인의 사진도 공개됐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추도식장에서 노예제 폐지에 헌신한 존 뉴턴 신부가 지은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놀라운 은총)>를 불러 던 세계에 울림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