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정체성을 고취시킨 과격파 해방운동가, 말콤 X
말콤 X(Malcolm X)는 1925년 네브레스카 주 오마하의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말콤 리틀시다. 아버지 얼 리틀은 침례교 목회자이자 세계흑인개선협회(UNIA) 회원으로, 자메이카 출신 흑신 지도자 마커스가비의 "아프리카로 돌아가자"는 귀향운동에 참여하다 백인 우월주의자에게 살해(공식적으로는 전차사고)됐다.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수용됐다.
그는 청소년기에 성적이 우수했으나 흑인에 대한 차별과 기회 제한시 당연시된 절망적인 사회환경에 분노해 열다섯 살에 자퇴했다. 이후 뉴욕 할렘과 시카고, 보스턴 등지에서 잡일을 하거나 마약 • 강도 등 범죄를 저지르며 밑바닥 인생을 전전했다.
1945년 절도죄로 8년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수감됐다. 감옥에서 독학을 시작했고, 흑인 민족주의 종교 '내이션 오브 이슬람(블랙모슬렘)' 지도자 일라이저 무하마드(엘리야 무함마드)에게 감화되어 무슬림으로 개종했다.
1952년 가석방된 후 조직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푸른 눈의 백인 악마"가 자신의 선조에게 붙인 리틀이란 성을 버리고 말콤 X로 개명했다. 그는 외할머니가 백인에게 강간당해 어머니를 낳았기 때문에, 자신에게 백인의 피가 일정 정도 흐른다는 사실을 증오했다.
블랙모슬렘의 대변인을 맡아 뛰어난 연설능력으로 작은 종교단체를 10년 만에 2만 5천에 달하는 거대한 조직으로 성장시켰다. 그의 흑인 인권운동은 "흑은 흑이고 백은 백"이라는 신념 아래 흑백 분리를 주장('블랙내셔널리즘')하는 과격 노선이었다.
전국적인 유명인사로 떠오른 그는 백인 주류의 미국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흑인들의 인종적 자부심을 고취시키며 답답한 속을 통쾌하게 뚫어주었고, 마틴 루터 킹의 온건한 흑백 공존 타협 노선과 별개의 길을 걸었다.
말콩 X는 1963년 이슬람교의 성지 메카를 순례하며 사상적 변화를 겪었다. 수니파 무슬림이 되어 '엘 하지 말리크 엘 샤바즈'로 개명한 그는 일라이저 무하마드의 비도 덕성을 비판하며 1964년 블랙모슬렘을 탈퇴했다.
백인을 악으로 여기는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 전인류적 연대를 지향했지만 "폭력에는 폭력으로"라는 직접투쟁 신념을 꺾지 않았다. 흑인 빈민의 주거와 교육 등 현실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돌렸고, 마틴 루터 킹과는 영향을 주고받으며 흑인 선거권(공민권운동)과 관련해 노선을 공유했다. 그는 연설에서 "투표권 아니면 총알을!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이라고 외쳤다.
이 무렵 말콤 X는 블랙모슬렘은 협박에 시달렸다. 1965년 2월 14일 방화로 인해 그의 집이 불탔다. 그리고 일주일 후인 2월 21일 아프로아메리칸(아프리카계 미국인) 연대기구(OAAU) 주최 행사에서 연설을 준비하던 중 세 명은 흑인에게 열여섯 발의 총알을 맞고 사망했다. 암살자 무자히 할림(토머스 헤이건 또는 탈마지 헤이어), 무하마드 압둘 아지즈, 칼릴 이슬람은 블랙모슬렘의 조직원으로 알려졌다.
광기의 KKK단
쿠 클럭스 클랜은 미국 남북전쟁 이후(1866년) 조직된 인종차별적 극우 비밀결사다. 노예제 유지를 주장했던 남부 백인들이 에이브러햄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에 반발해 흑인들에게 무차별 테러를 가하는 잔인한 폭력 행위를 일삼았다.
연방법 단속에 의해 한때 형식적으로 해체됐지만, 1915년 흑인에 대한 백인 지배를 내세우며 제2차 조직이 결성됐다. 불타는 나무 십자가를 상징으로 삼아 하얀 가운에 복면을 쓴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혼란한 사회상을 틈타 급속도로 확산되어 회원이 200만에 달하기도 했다. 흑인은 물론 가톨릭계 이민자와 유대인, 동양인 등 소수자 전체를 적대시했고, 1928년 워싱턴D.C에서 대규모 가두행진을 벌였다. 나치와도 협력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뒤 세를 잃어 거의 소멸했다. 그러나 1960년대에 제3차 조직이 재건돼 흑인 공민권운동 등을 상대로 끝없이 테러를 자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