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 독립운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피, 아웅 산
아웅 산(Aung San)은 1915년 영국 치하 버마(미얀마)의 마구에 현 나마우시에서 태어났다. 1932년 양곤(랭군)대학교에 입학해 1936년 우 누(U Nu)와 동맹휴학을 주도했다.
1886년 영국 식민지인 인도 제국에 합병됐던 버마는 1937년에 별도의 식민지로 분리됐다. 아웅 산은 1938년 반영 독립운동을 위해 급진파 타킨당에 입당해 이듬해 서기장이 됐다.
영국의 체포령이 내려진 1940년 그는 일본으로 탈출해 '30인의 동지' 일원으로서 군사훈련을 받고, 중국 하이난 섬에서 버마독립군(BIA)을 양성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아웅 산은 일본의 지원 아래 버마 독립군을 이끌고 돌아왔다. 이 무렵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을 내세우며 동남아니아 지역의 식민국을 회유했다. 일본 점령 하의 버마에서 버마방위군(BDA)을 지휘한 아웅 산은 1943년 바 모(Ba Maw)를 수반으로 한 임시정부의 국방장관에 취임했다. 이 시기 버마 북부 지역에서는 대동아 전쟁의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아웅 산은 영국보다 더욱 잔혹하게 통치하는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30인의 동지와 반파시스트 인민자유연맹(AFPFL)을 조직해 버마국민군(BNA)을 이끌고 1945년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일본군이 버마에서 철수한 뒤 영국이 버마를 재점령했다.
종전 후 인민자유연맹 총재에 오른 아웅 산은 1947년 1월 런던에서 영국 클레멘트 애틀리 수상과 회동해 버마 독립에 관한 협정('애틀리 • 아웅산 협정')을 체결했다. 인민자유연맹은 4월 제헌의회 선거에서 압승했다. 그러나 아웅 산은 7월 19일 양곤에서 행정참사회 회의 도중 다섯 명의 각료와 함께 신원미상의 무장테러단에 의해 암살당했다. 암살 주도 혐의로 우간다에 억류돼있던 우 사우가 지목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버마 민중 사이에는 영국이 암살의 진짜 배후라는 소문이 돌았다.
버마식 사회주의
1948년 1월 버마가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뒤 우 누가 초대 수상으로 취임했다. 우 누 재임 시절인 1961년 불교가 버마의 국가 공식 종교로 선포되어 소 도살이 금지됐다.
우 누의 불교식 사회주의는 소외당한 소수민족과 공산당의 불만을 샀다. 반란이 빈발하자 1962년 쿠데타를 일으킨 네 윈(Ne Win, 슈마웅)이 이 같은 조치를 중단했다. 혁명평의회 의장으로서 '버마식 사회주의(사회주의 버마의 길)'를 채택한 네 윈은 12년간 군사정부의 수장을 지냈다.
1974년부터 민선 의회에 정권을 이양하는 듯했지만 대통령으로 선출돼 집권을 이어나갔다. 그는 산업을 국유화하고 소수민족을 탄압했으며 폐쇄적인 경찰국가로서 고립주의를 택했다. 네윈 집권기간에 버마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가 됐다.
1981년 대통령에서 물러난 후에도 사회주의 계획당 의장으로서 국정에 관여했다. 네 윈은 '8888 항쟁'의 책임을 지고 의장을 사임했다.
버마 민주화운동
아웅 산이 사망한 뒤 미망인 킨 치는 중앙정계에서 활동하다 1960년 인도 대사로 부임했다. 1962년 네 윈이 쿠데타를 일으켜 버마식 군부 사회주의 독재정권이 들어섰다.
1988년 8월 8일 양곤의 대학생을 주축으로 한 반군부 민주화운동(8888 항쟁)이 일어났다. 평화적 시워를 네 윈의 군부가 무차별 진압하여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낳았다.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영국인과 결혼해 평범한 주부로 살아가던 아웅 산의 딸 아웅 산 수 치(아웅 산 수지)는 8888항쟁을 기점으로 정치일선으로 뛰어들었다. 버마 민주화운동의 지도자가 된 그녀는 군부독재의 종식을 촉구하다 1989년 가택연금을 당했다.
1990년 서방의 압력으로 실시한 총선에서 아웅 사 수치가 결성한 민주민족동맹(NLD)이 압승했으나 군부는 선거 결과에 불복하고 이를 무효화했다. 아울러 민주인사 수백 명이 투옥되고 공포정치가 이어졌다.
'철의 난초' 아웅 산 수 치는 1991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가택연금은 무기한 연장됐다.
버마 군부는 다른 민주화 인사에 대한 탑압과 달리 아웅 산 수 치에게는 차마 함부로 하지 못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버마의 영웅 아웅 산 장군이었기 때문이다. 2010년 말에야 비로소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아웅 산 수 치에 대한 가택연금이 해제됐다. 그녀는 2012년 4월 국회의원 보궐선건에서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