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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탄에 비명횡사한 산업혁명기 영국 수상, 스펜서 퍼시벌

Genius Dotory 2022. 8. 29. 20:37

스펜서 퍼시벌(Spencer Perceval)은 조지 3세의 치세 초반인 1762년 아일랜드 귀족 존 퍼시벌(제2대 에그몬트 백작)의 아들로 태어났다. 왕세자와 가까운 사이였던 아버지는 그가 열 살 때 사망함으로써 정치적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
퍼시벌은 케임브리지 트리니티칼리지를 졸업하고 1786년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그가 담당한 워렌 헤이스팅스(영국령 인도의 초대 총독) 탄핵 사건을 계기로 정계에 진출해,1796년 국왕의 자문관이 됐으며, 토리당 당수 윌리엄 피트(소 피트) 내각의 열정적인 의원이언다. 하지만 완고한 성공회(영국 국교회)교도인 그는 소 피트가 주장한 가톨릭 해방(투표권 허용) 법안에 강경하게 반대했다.
1801년 헨리 애딩턴 내각의 법무차관에 임명됐고, 1802년 법무장관이 되어 제2차 피트 내각 때도 이를 유지했다.
1806년 피트가 사망한 이후 퍼시벌은 관례대로 사임했지만, 1807년 섭정법을 입안한 윌리엄 그렌빌이 수상직에서 해임된 후 포틀랜드 공작 윌리엄 캐번디시 내각의 재무장관 겸 랭커스터 공령 상서가 됐다.
1809년 포틀랜드 공작이 갑자기 사임하자 뜻밖에 퍼시벌이 수상에 임명됐다. 그는 1810년부터 정신건강상의 이유로 국왕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된 조지 3세를 대신하여 섭정을 맡은 웨일즈공 조지 왕세자와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지위를 확고히 해나갔다. 밖으로는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1806년 반포된 영국에 대한 경제제재 조치)' 이후 대외무역 손실이 이어지고, 안으로는 심각한 경기침체가 계속되면서 '러다이트 봉기(1811년 직물공업지대에서 일어난 기계파괴운동)'가 일어났지만, 혼란 상황에도 냉철한 국정수행으로 내각을 안정화했다. 그러나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으로 대륙봉쇄령이 해제되던 시점에 예상치 못한 불행을 맞았다.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큰 부채를 안고 파산한 상인 존 벨링햄이 정부에 손실 보상을 요구했다가 거부당하자 원한을 품고 하원 의사당에 침입했다. 퍼시벌은 의회 복도에서 정신착란을 일으킨 것으로 추정되는 벨링햄의 총탄에 맞아 즉사했다.

토리당과 휘그당
영국 최초의 근대적 정당인 토리당(Tory Party)과 휘그당(Whig Party)은 청교도 혁명과 왕정복고 이후 1679년 가톨릭교도인 요크 공작 제임스(훗날의 제임스 2세)의 왕위계승과 관련해 찬성파와 반대파로 의회의 파벌이 나뉘면서 시작됐다. 토리당은 왕위계승에 찬성했고 휘그당은 반대했는데, 이들은 서로를 '휘그(폭도)', '토리(도적)'라고 얕잡아 부르면서 대립했다. 두 당은 1688년 명예혁명 때만 잠시 협력했고 여러 분야에서 입장 차이를 보였으나 영국의 책임내각제와 양당제 확립에 기여했다.
1714년 하노버 왕조가 개창하면서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조지 1세와 조지 2세가 내각에 정치를 일임했고, 휘그당의 올포드 백작 로버트 월폴이 초대 수상이 됐다. 이때부터 영국에는 "국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전통이 시작됐다.
왕권회복을 꾀한 조지 3세가 집권하기 전 50년은 휘그당이 정권을 잡았으며, 집권 후 50년은 토리당이 정권을 잡았다. 1830년대의 정계개편으로 토리당은 보수당으로, 휘그당은 자유당(이후 자유민주당)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자유당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노동당에 자리를 내주고 몰락했다.

조지 3세의 광기
무려 60년간이나 왕위를 지킨 조지 3세는 하노버 왕가의 앞선 군주들과 달리 완벽한 영어를 구사했으며, 왕권 회복을 꾀하여 어용당을 만들었다. 이로써 국정지도력은 강화됐으나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혹독한 중과세가 1775년 미국 독립전쟁을 초래하여, 그 결과 새로운 국가인 미국이 탄생했다. 그의 치세에는 소 피트가 주도한 토리당 시대가 지속됐다.
조지 3세는 소박하고 성실하여 '농부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지만, 1810년부터 국왕 업무를 거의 수행하지 못했다.
막내딸의 죽음 이후 정신착란 증세가 심해진 결과라고 전해지는데, <조지 왕의 광기>라는 영화에서 당시 왕의 상황이 다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