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두대의 공포로 혁명을 견인한 저널리느트, 장 폴 마라
장 폴 마라(Jean-Paul Marat)는 1743년 스위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십대부터 유럽 각지에서 과학을 공부했고, 삼십대 초반까지 런던에서 개업의로 활동했다. 《노예 제도의 사슬》등 정치이론서를 집필해 절대군주정을 비판했으며, 1777년 프랑스로 이주해 아르투아 백작(훗날의 샤를 10세) 휘하의 의사로 일하면서 과학적 실험과 논문 저술을 병행했다.
1783년에 의사를 그만둔 후 혁명의 최전선에서 급진적인 반체제 운동가로 활동했던 마라는 1789년 7월의 바스티유 습격 두 달 후 <인민의 벗>이라는 신문을 발행했다. 민중의 계급의식을 고취하고 '혁명의 적'에 대한 과격한 불관용 적대 여론을 조성함으로써 이들의 생살여탈에 영향을 미쳤으며, 1790년에는 잠시 영국으로 망명하기도 했으나 곧 복귀해 왕당파는 물론 혁명 온건파의 말살까지도 촉구했다.
1792년 혁명의 분수령이자 왕정 폐지에 쐐기를 박은 '튈르리 궁전 습격(루이 16세 일가를 유폐시킨 8월 10일의 봉기)'과 공포정치의 서막을 연 '9월 대학살(9월 2일부터 7일까지 6일 동안 파리에서만 1천200여 명의 수감된 반혁명세력이 살해당한 사건)'을 부추기며 제1공화정 수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조르주 당통(Georges Danton),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spierre)와 함께 국민공회시대를 열어 프랑스 대혁명의 3대 주역으로 자리매김했다.
1793년 1월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된 이후, 4월에 혁명 온건파의 정치적 공격을 받았으나 오히려 전세가 역전돼 이들을 몰락시키고 권력의 정점에 섰다. 하지만 7월 중순, 욕실에서 스물다섯 살의 혁명 온건파 여성 샤를로트 코르데에게 암살당했다.
혁명가들의 비참한 최후
1793년 7월 마라가 암살당한 후 공안위원회가 설치되고 혁명정부의 공포정치가 본격화됐다. 10월에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됐으며, 1794년까지 약 30만 명의 반혁명분자들이 체포되고 학살당했다. 이때 사형당한 사람만 무려 1만 7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러한 광기의 부메랑은 공포정치를 주도한 이들에게도 돌아왔다.
1794년 3월에 자크 에베르가 처형됐고, 4월에는 당통이 처형됐다.그리고 7월에 '테르미도르 반동'이 일어나 로베스피에르마저 처형됐다. 1795년 10월, 코르시카 출신의 군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가 등장함으로써 혁명의 혼란은 일단락됐다.
나폴레옹의 전성기와 몰락
나폴레옹은 1795년 파리의 반란을 진압한 후, 1796년부터 혁명이념을 두려워한 유럽 각국을 상대로 프랑스 혁명전쟁을 선두에서 지휘했다.
1799년 군사독재 통령 정부를 수립했으며, 1804년 인민투표로 황제(나폴레옹 1세)에 즉위해 제정시대를 열었다. 그는 유럽사의 유례없는 정복전쟁을 수행하며 승승장구했으나, 1812년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고 1814년 대 나폴레옹 연합군에 패배해 엘바 섬으로 유배당했다.
1815년 다시 황제에 즉위했지만 얼마 후 워털루 전투의 패배로 세인트헬레나섬에 유배됐다. 1821년 그가 유배지에서 사망함으로써 나폴레옹의 황금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