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관용과 정치적 독립의 수호자, 오라녜공 빌럼 1세
오라녜공 빌럼 1세(Prince van Oranje Willem 1)는 1533년 신성로마 제국 딜렌부르크에서 나사우 백작의 아들로 태어났다.
1544년 오라녜와 나사우의 영지를 상속받았으며, 이후 신성로마 제국 황제이자 에스파냐 왕국 초대 국왕 카를 5세(카를로스 1세)에게 발탁됐다.
그는 에스파냐 2대 국왕이 된 펠리페 2세로부터 네덜란드 지방인 홀란트, 제일란트, 위트레흐트, 프랑슈콩테 4개 주의 총독으로 임명받았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주창한 이래 유럽에는 프로스테스탄트 사상이 확산됐는데, 빌럼은 가톨릭교도였으나 에라스뮈스의 인본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종교적으로 애초에 중립적이었으며 가족 중에도 루터교 신자가 다수 있었다. 하지만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펠리페 2세는 개신교 신앙이 활발한 네덜란드에 강력한 중앙집권정책을 시행하면서 높은 세금을 매기고 신교도를 탄압했다.
1566년 빌럼은 루터파 신교로 개종했는데, 이 무렵부터 에스파냐의 학정에 대항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칼뱅주의 신교도들이 가톨릭 교회를 습격해 방화와 성상 파괴를 실행했고, 1567년 군사 독재권을 위임받아 총독으로 파견된 알바 공장(페르난도 알바레즈 데 톨레도)의 무자비한 공포정치와 종교박해로 수많은 신교도가 처형당했다. 이때 펠리페 2세의 무조건적 복종 서약을 거부한 빌럼도 영지를 몰수당하고 딜렌부르크로 망명했다.
그리고 1568년부터 빌럼을 구심점으로 대 에스파냐 항전이 일어났다. 이는 1648년 네덜란드 독립이 국제법적으로 승인되기까지 '80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그는 1572년 홀란트와 제일란트에서 일어난 민중봉기에 합류해 2개 주의 총독에 취임했고, 이듬해 칼뱅파 신교로 개종했다.
1567년 네덜란드 17개 주가 독립 및 종교적 관용에 협의한 브뤼셀 동맹('헨트 협약', '겐트 화약', '강의 맹약')을 이끌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남부 10개 주가 이탈했다.
빌럼은 1579년 북부 7개 주를 규합해 에스파냐에 대한 철저한 항전을 맹약하는 위트레흐트 동맹을 결성했다.
1580년 에스파냐의 종교재판소가 그를 이단이라고 선포했으며, 펠리페 2세는 그의 암살에 막대한 현상금을 걸었다.
위트레흐트 동맹을 기초로 1581년 독립선언을 공포하고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이 사실상 수립됐는데, 빌럼은 초대 총독에 취임했다.
그는 수차례의 암살 위협 속에서도 네덜란드의 종교와 정치의 자유를 위해 앙주 공장(프랑스 국왕 앙리 3세의 동생인 알랑송공 에르퀼 프랑수아)을 군주로 추대하는 등 외교적 교섭을 멈추지 않았지만, 결국 1584년 델프트에서 가톨릭 광신자 발타자르 제라르(Balthazar Gerard)에 의해 암살당했다.
1587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이끈 오라녜공 마우르츠는 근대적인 군대를 육성하고 네덜란드 주요 도시들을 점령해 현재와 유사한 국경을 확립했다.
30년 전쟁
1618년 보헤미아 신교도의 반란과 신성로마 제국의 무력 진압을 계기로 발발한 '30년 전쟁'은 표면적으로는 종교 갈등이 원인이었지만 실상은 유럽 여러 나라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참전한 영토전이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30년 전쟁이 종결되면서, 개신교의 지위가 공고해지고 네덜란드 독립이 정식으로 승인됐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로마 가톨릭과 신성로마 제국의 권력을 약화시켰고, 국제법과 근대국가의 초석을 놓았으며, 유럽 국가들 간의 세력 균형을 재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