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대 만에 멸망한 통일 왕조의 창업군주, 수문제 양견
양견은 541년에 북주의 12대장군 수국공 양충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았다. 큰딸이 선제의 황후 중 한 명이 됐으며, 579년 일곱 살의 정제 우문천이 즉위한 후에는 섭정이 되어 실권을 장악하고 승상과 수왕의 지위에 올랐다.
북주의 제5대 마지막 황제인 정제로부터 581년 제위를 선양받아 수나라를 건국하고 장안에 도읍을 삼았다. 즉위 후 정제를 비롯한 북주의 황족 다수를 살해하고 남벌을 진행해 589년 후한 말 황건의 난 이후 분열됐던 중국 대륙을(과도기였던 진나라의 통일을 제외하고) 거의 400년 만에 재통일했다.
양련은 과거제의 전신인 선거제를 도입하고 중앙관제를 삼성육부제로 개편했으며 균전제를 확립시키는 둥 제도를 정비해 나라를 안정시켰다. 또한 불교를 장려하고 국토를 넓히며 '개황의 치' 로 일컬어지는 전성기를 열었으며 막강한 경제력을 토대로 대운하 건설을 시도하기도 했다.
고구려에 조공을 요구했다가 영양왕으로부터 선제공격을 받고, 30만 대군으로 고구려 침공을 시도했지만 풍랑과 역병 등으로 인해 철군한 것은 그의 치세에 보기 드문 오점이었다. 그러나 양견의 가장 큰 불행은 후계 문제에서 발생했다.
그는 장남을 폐태자하고 야심가인 차남 양광을 태자로 삼았다가 604년 양광의 심복들에 의해 암살당했다(양광이 아버지의 후궁을 탐해 독살했다는 야사도 전한다).
수나라는 비록 38년 만에 단명했지만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명군주였던 수문제 양견이 확립한 많은 제도와 정책들은 이후 중국 통일 왕조의 뼈대로 기능했다.
아버지를 살해한 수양제
수양제 양광은 604년 아버지 양견을 시해하는 패륜을 저지르고 황위에 올랐다. 수문제 사후에 근위장 우문지급을 통해 형마저 살해했다고 한다.
즉위한 후에는 만리장성 보수 및 대운하 공사, 낙양 제2수도(동도)와 양주 제3수도(강도) 건설 등으로 국고의 탕진을 가속롸랬고, 그 과정에서 백성들을 잔혹하게 수탈했다.
양광의 악정은 고구려 원정에서 절정에 달했다. 그는 612년 113만 대군을 동원해 대공세에 나섰는데, 요동성 공략에 실패했고 살수에서 30만 군사가 궤멸했다. 613년 재공격에 나섰지만 국내의 반란이 원인이 되어 또 다시 퇴각했으며, 614년 3차 원정 때는 외고젹 화해를 명목으로 공격을 개시하기 전에 철수했다.
이후 양광은 주색잡기로 소일하다가 617년 이종사촌이자 당나라의 초대 황제가 되는 이연에게 정권을 빼앗겨 폐위당했고, 618년 근위장 우문화급이 일으킨 폭동 당시 교살당했다.
이로써 아버지가 이룩한 통일 대제국 수나라가 아들의 대에 이르러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